에피쿠로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에피쿠로스 학파(Epicurianism)이라 불리는 학파의 창시자이다. 에피쿠로스는300여권의 저술활동을 했으며 그중 몇 권 정도의 일부만이 알려져 있다. 알려진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의 대부분은 후대의 추종자들이나 해설자들에 그 유래가 있다.
에피쿠로스에게 철학의 목적은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얻는 데 있었다.
그가 말하는 행복과 평온이 함께하는 삶은 평정, 평화,공포로부터의 자유, 무통의 특징이 있다. 그는 쾌락과 고통은 무엇이 좋고 악한지에 대한 척도가 되고, 죽음은 몸과 영혼의 종말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했습니다.
신은 인간을 벌주거나 보상하지 않고, 우주는 무한하고 영원하며,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궁극적으로는 빈 공간을 움직이는 원자들의 움직임과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 플라톤 학자인 팜필로스 아래에서 4년 동안 철학을 공부했다. 18살에 2년 동안 아테네에서 군인으로 복역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에피쿠로스는 호출로 휴대전화기에서 가족과 합류하게 된다. 이후 그는 자연주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제자인 나으오. 시 파네스(Nausiphanes) 아래에서 공부한다.
에피쿠로스의 생애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철학자 전기 제10권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의 부모 내오. 크로스(Neocles)와 하니 리스트 우유는 모두 아테네 출생이었으며 에피쿠로스는 기원전 341년 2월에 소아시아의 사모스 섬에서 출생하였다.
시민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에피쿠로스가 태어나 결점이 태어나기 십 년 전에 에게 해의 사모스 섬으로 이주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난 뒤 즉위한 페르디카스는 사모스 섬의 아테네인이 주민들을 이주민들을 호출로 휴대전화기(Colophon)로 이주시켰다. 기기 원전 311년과 310년에 에피쿠로스는 미틸리니에서 강연했으나 이에 대해 반발 이해 반발이 생겼고 그는 미틸리니에서니 에서 쫓겨났다.
그러자 그는 람프사쿠스(Lampsacus)에서 학교를 세웠고 기원전306년에는 아테네에서 그의 학파가 만남의장소로 사용했던 ‘정원’(the Garden)을 만들었다.
그의 많은 사상이고 이전의 철학자들, 특히 데모크리토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그는았지만그는 결정론에 관해서는 데 모크리토스와의견을 달리했다 의견을 달리했다.
그는 그가 다른 철학자들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었다는 사실을 부정했으며 다른 철학자들을 비난했고, 그는 의견들을 스스로 발전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아이도 없다.
그는 요로 결석을 앓았으며 이는 그가 기원전 270년 전 270년 결국 사망하는 원인이 된다. 요로 결석의 굉장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는 개는 이도메네우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고 한다.
"나는 이 편지를 내 삶의 마지막이기도 하지만 기분 하지만 기분 좋은 날에 쓰네. 소변을 볼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인 데다가 세균성 이질까지 겹쳐내 고통은 더 내 고통은 더 이상 심각해질 수 없을 정도네. 그렇지만 내 철학적 사색들로부터 오는 기쁨이 이는 기쁨이 이 고통을 상쇄 시켜준다네. 자네에게 부탁하네. 메트로도루스(Metrodorus)의아들을 잘 잘 돌봐주게. 그 젊은이가 내게, 그리고 철학에 보여준 헌신은 그럴만한 가치가 한가치가 있다네."
에피쿠로스는 직접적인 관찰과 이론적인 추론으로 시험 된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과학과 과학적 방법의 발전에서 중요한 인물이 된다. 그의 상호 관계에서의 윤리에 대한 주장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최초였으며 윤리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자연과 물리에 대한 많은 생각은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학적 개념들을 예견했다. 그는 기원전800년부터 기원전200년까지의 중국, 인도, 이란, 근동, 고대 그리스에서 혁명적인 생각이 나오던 시대의 중요 인물이었다.
그는 한 사람에게 대한피해의 최소와 다른 사람에게 대한최대의 행복을 강조함으로써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의 공식화와 구별되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원자들이 아무런 계획이나 목적 없이 충돌하고 되 튀며, 서로 부착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들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현대의 물질 관과비교해보라) 하지만 그는 그 입자들의 운동이 단순한 직선이 아니라 가끔 방향이 바뀐다고 말했다는 점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는 달랐다. 이것은 이전의 원자론에서는 필연적이었던 결정론을 피하고 세상에 자유 의지를 부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불확정성과 비교해 보라)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은 그와 동시대의 그리고 그 이전의 다른 그리스 철학자들과는 다른 사상이었으나, 데모크리토스의 사상이 가졌던 여러 원칙과 같은 원칙들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데모크리토스처럼 그 또한 세상은 더쪼갤 수 없는 작은 조각들이 빈 곳을떠다니는 것이라고 믿은 원자론자였다.
그는 정기적으로 여성들과 노예들을 그의 학파에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인에게 근본적인 인간 평등사상을 소개했다. 또한 그는 당시에 흔하던 신을 두려워하고 신을 숭배하는 전통을 깨뜨린 최초의 인물들 중하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종교적 활동을 신을 생각하며 그들을 하나의 행복한 삶의 예시로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했다. 에피쿠로스는 전통적인 그리스 종교 활동에 참여했으나 신에 대해 거짓된 생각을 하는것은 잘못됐다고 가르쳤다.
그에 의하면 신들은 불사의 존재이며 축복받은 존재이고,이 이외에 그 어떤 부가적인 가치를 신에 부과하는 것은 불경한 행위이다.
신은 우리가 흔히 믿는 것처럼 나쁜 자를 벌하고 착한 자에게 상 주지 않는다.
대중들은 신이 사악한 인간에게는 악을 주고, 신을 모델로 삼아 올바른 생활을 하는 인간들에게는 축복을 준다고 믿지만, 에피쿠로스는실제로 신들은 인간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믿었다. 불경한 자는 대중이 숭배하는 신을 부정하는 자가 아니라 신에 대해 대중이 믿는 대로 단언하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소년 시절 플라톤 학자인 팜필로스 아래에서 4년 동안 철학을 공부했다. 18살에 2년 동안 아테네에서 군인으로 복역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에피쿠로스는 호출로 휴대전화기에서 가족과 합류하게 된다. 이후 그는 자연주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제자인 나으오. 시 파네스(Nausiphanes) 아래에서 공부한다.
에피쿠로스의 생애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철학자 전기 제10권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의 부모 내오. 크로스(Neocles)와 하니 리스트 우유는 모두 아테네 출생이었으며 에피쿠로스는 기원전 341년 2월에 소아시아의 사모스 섬에서 출생하였다.
시민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에피쿠로스가 태어나 결점이 태어나기 십 년 전에 에게 해의 사모스 섬으로 이주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난 뒤 즉위한 페르디카스는 사모스 섬의 아테네인이 주민들을 이주민들을 호출로 휴대전화기(Colophon)로 이주시켰다. 기기 원전 311년과 310년에 에피쿠로스는 미틸리니에서 강연했으나 이에 대해 반발 이해 반발이 생겼고 그는 미틸리니에서니 에서 쫓겨났다.
그러자 그는 람프사쿠스(Lampsacus)에서학교를세웠고기원전306년에는아테네에서그의학파가만남의장소로사용했던‘정원’(the Garden)을 만들었다.
그의 많은 사상이고 이전의 철학자들, 특히 데모크리토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그는았지만그는 결정론에 관해서는 데 모크리토스와의견을 달리했다 의견을 달리했다.
그는 그가 다른 철학자들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었다는 사실을 부정했으며 다른 철학자들을른 철학자들을 비난했고, 그는 의견들을 스스로 발전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아이도 없다.
그는 요로 결석을 앓았으며 이는 그가 기원전 270년 전 270년 결국 사망하는 원인이 된다 된다. 요로 결석의 굉장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는 개는 이도메네우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고 한다.
"나는 이 편지를 내 삶의 마지막이기도 하지만 기분 하지만 기분 좋은 날에 쓰네. 소변을 볼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인 데다가 세균성 데다가 세균성 이질까지 겹쳐내 고통은 더 내 고통은 더 이상 심각해질 수 없을 정도네정도네. 그렇지만 내 철학적 사색들로부터 오는 기쁨이 이는 기쁨이 이 고통을 상쇄 시켜준다네. 자네에게 부탁하네. 메트로도루스(Metrodorus)의아들을 잘 잘 돌봐주게. 그 젊은이가 내게, 그리고 철학에 보여준 헌신은 그럴만한 가치가 한가치가 있다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모든 선하고 나쁜 것은 쾌락과 고통의 지각에서 오는 것이라고 했다.
좋은 것은 기쁜 것이고, 나쁜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쾌락과 고통은,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선함과악함의 궁극적인 도덕적 기준이다. 만약 고통이 쾌락보다 더 큰데도 그것이선택되었다면그것은그것이결국에는더큰쾌락으로이어지기때문이다.
에피쿠로스가 무분별한 쾌락의 추구를 지지했다고흔히오해받지만, 그가 진실로 원했던 것은 고통의 부재-죽음의 공포 외신의 응보로부터 자유로운 만족감과고요함의상태였다.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가 고통으로괴롭지않을때, 우리는 더 이 상 쾌락이 필요 없고, '완벽 한마음의 평화의 상태'가 된다.
에피쿠로스는(아리스토텔레스와 반대로)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고 믿었다.
사람이 죽을 때, 그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느낄수없고죽음의고통도느끼지못한다. 따라서 에 피고 로스의 유명한 말대로“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존재할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과 함께 모든 감각과 의식이 끝나기 때문에 죽음에는 쾌락도 고통도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 있을것이라는잘못된믿음때문에생겨난다.
고대 철학자 에피쿠로스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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