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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한국의 유교에 대한 정보 1편

<한국의 유교사상에 대하여_1>

 

동아시아의 사상의 흐름은 크게 유교와 불교, 도교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중국과는 지역적으로 인접하기 때문에 유교사상이 한국에 들어와 민족정신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유교라면 중국을 발상지로 하고 그것이 여러 나라로 전해진 것으로 되어있다. 이는 고구려/백제/신라를 통해 나타난다.

 

신라의 국학 설립은 682년으로서 교과내용이 오경으로 되어있으며 논어, 효경을 필수로 하였던 것이다. 또한 설총은 이두로써 구경을 설명하였다. 이미 진흥왕 때 화랑 제도를 창설함에 있어서 "효제충신은 나라 다스림의 대요"라고 하여 유교 이념을 근본으로 했다. 화랑들이 연마한 것은 임신서기석에서 볼 수 있듯이 유교 경전이었다. 또한 진흥왕 순수비 속에 나오는 "몸을 닦아 백석을 편안케 한다"란 논어의 구절이나 '충신정성'/'위국진절'등의 용어가 나오는 것은 치국의 이념으로서 유교사상이 기초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는 372년에 태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으며 지방 곳곳에 경당을 두어 청년들에게 유겨 경전과 궁술을 연마시키기도 했다. 이것은 유교의 경전과 6 예로써 국민교육이 실시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백제도 위와 같은 시기인 근초고왕 때 박사 왕인이 일본으로 <논어>와 <천자문>을 전수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유교 경전을 연구하는 기관리 설치되고 유학사상이 널리 보급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신라, 고구려, 백제로 볼 수 있듯이 유교 사상은 이미 삼국시대에 오경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정치이념이 되었으며 국민을 교육하는 원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유교에서는 효의 관념을 중시하거나 삼국시대에 있어서 국가의 체제가 정비되어 감에 따라 그 기반을 확고히 할 뿐 아니라 국력을 신장하고 국가를 수호한다는 필요성에 의하여 효와 충의 의미가 강조되었다.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효와 충은 지금의 우리 나라 유교의 보편적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대표적 유가로는 신라의 설총, 최지원 등인데 설총은 방언으로서 구경을 해석하여 뒷사람을 가르쳤으며 최지원은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

 

 황소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토황 소격>을 지어 천하에 문명을 떨쳤다. 고려 태조 왕건이 건국 후 불교를 숭상하자 유학은 점점 쇠미하더니 제6대 성종에 이르러 국자감을 설치, 경학박사를 두고 유학을 장려하였으나 사류는 모두 시부 공령의 업에 힘썼을 뿐 경학에 종사하는 자는 심히 적었다.

 

고려시대의 유교사상에 대하여 알아보자.

 

신라 말기의 어지러운 난국을 타개하고 통일 국가를 형성한 고려 태조 왕건은 국가의 창업이 불력과 삼한산천의 도움으로 된 것이라 하여 불교를 장려하고 토속적인 신앙과 도교적인 풍수설을 숭신 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인 통치이념에서는 태조십훈요의 끝부분에 보이는 바와 같이 유교사상에 구하였던 것이다. 

 

 경사를 널리 보고 후대의 왕들에게 어진 정치를 베풀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서경에 학교를 세운 것도 유교를 이념으로 인재를 교육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1대 문종 때에 최충의 구재를 비롯한 사립 학굑가 성행하여 이른바 십이 도가 일어나고 경사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풍이 생겼다. 그러나 최충 이후 200여 년간 유교는 부진한 상태였고 대부분이 시부를 위주로 한 문장학에만 치중하였다. 당시에는 유가라 해도 순수하게 유학만 연구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 있어서 당나라 시대의 경향과 같이 유/불교가 혼합된 상태였다.

 

 이에 따라 고려말에 이르러서는 건국 이래 겪어온 문화적인 침체를 타개할 수 있는 개혁이 필요했다. 이에 부응해 일어난 것이 유교의 혁신 운동이다. 제25대 충렬왕 때에 안향이 충렬왕을 따라 대도에 들어가 <주자 전서>를 입수하고 돌아온 후 정부에 건의하여 국학을 세우고 문묘를 중수하게 하는 등 유학 부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조선시대의 유교사상에 대하여 알아보자.

 

조선의 유교는 철학이 중심이었고 그 철학은 하나의 학문으로서만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민중을 움직이기도 하는 특성을 보인다. 국정의 부패를 규탄하는 유생들의 상소나 국권이 침해되었을 때 항거하는 의로운 행동을 보여줌은 한국 유교사의 면목이 되기도 한다.

 

공민왕 이후로 신진 사류들에 의하여 원의 정치적 억압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배 원친명 사상이 주창되고 불교가 세속화하고 이익의 근원으로. 삼는 것에 대한 강력한 배척 운동이 일어났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친족 혼을 폐지하고 상례와 제례에 있어서 주자가례에 의한 유교의식을 따르도록 하는 등 일련의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통치이념을 유교에 두는 새로운 왕조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조선 초기로 넘어서면서 특히 경게의 견식과 정치의 수완을 겸비한 정도전은 조선 유교의 기초를 확립한 유학자로 <불씨잡변>, <심리기편>등의 글을 발표하여 유학의 입장에서 불교가 종교 및 도덕상으로 배척되지 않으면 안 될 까닭을 규명하는 동시에 유교의 진흥이야말로 국가 백년대계의 지상 이념임을 역설했다.

 

 정몽주의 뒤에 길재는 고려말에 과거에 급제하였다가 왕조가 바뀌자 시작하고 고향에 돌아가 절개를 지키며 후진 양성에 전력하니 그 문인에 김숙자 그 아들 김종직이 나와 사림파의 전통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