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인간이 행해야 할 궁극적인 지향점은 '인'에 있다_공자에 대한 정보

아이라이크에브리띵 2019. 12. 12. 12:58

<공자에 대한 정보>

공자의 중심 사상은 그가 제자들과 나눈 문답 형식의 언행집인 <논어>에 들어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인간이 취하여야 할 모든 행동의 궁극적 지향점은 인에 있다는 내용이다.

인을 지향하고 예에 정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소인이자 악인으로서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악인은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행한다. 

 또한 그는 '군자는 두루두루 소통하되 끼리끼리 하지 않고, 소인은 끼리끼리 하되 두루두루 소통하지 않는다.' 라 설파하였다.

대체로는 지덕, 지선의 뜻을 지니고 있는 인도주의로서, 정치적으로는 명분을 바르게 하고, ‘임금’은 ‘임금’ 답게, ‘신하’는 ‘신하’ 답게, ‘부모’는 ‘부모’ 답게, ‘자식’은 ‘자식’ 답게 각자가 본분을 지킴으로써 국가와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악하지 않고, 남을 부축하며, 자기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비론한 제덕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하기 싫은 것,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을 강악이라 하여 ‘악’으로 간주했다.

 인간은 성인과 군자 외에도 인간적으로 범인과 소인, 악인으로 구분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은 성인만이 능히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자신도 외경할 만큼 이루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으며, 성품은 엄숙·온화·원만하였다.

 사상이 현실적이고 현세적이었으며, 실용적, 합리적, 상식적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공자가 활동했던 시기의 은자들의 평가는 사뭇 달랐다. <장자>에서 도척이 공자에게 하는 말이나 '논어' 18:7에서 노인이 공자에 대해서 “팔다리로 부지런히 일도 하지 않고,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는데, 누가 선생님이란 말이오?”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생산활동을 도외시하고 결과보다는 뜻을 고려하는 태도에 회의적이었던 의견들이 당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생산활동을 하지 않는 사계급에 대한 비판은 법가에서도 드러난다. 제자를 교육함에서는 각인의 능력과 이해 정도에 따라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성품을 계발하도록 유도하였다.

공자의 군자교육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인’이다. 공자 사상의 핵심은 ‘인’으로 대체로 박애, 도, 덕, 선 등을 나타낸다. 하지만 명백한 개념이나 문장으로는 규정되지 않았다. 모든 걸 비롯했을 때 ‘인’은 휴머니즘을 뜻하고 있는 바다. 정치적으로는 이름을 바르게 하고, 이에 따라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책임과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인’을 사회생활에 적용한다면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 남을 부축하며,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 등을 덕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을 지향하고 예에 정진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소인으로 규정했다.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군자’가 ‘보편적임’과 비교하면 소인은 상대적이라고 역설, 인간을 인간적으로 구분하였다.

'인'은 공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최고는 도,덕이었다. 

중국인들은 인간에게서 기대되는 개개인의 훌륭한 자질을 ‘덕’이라고 생각하며, 나아가 ‘덕’을 영향력 내지는 인격력으로서 남에게 감화를 미치는 것으로 생각한다.

 중국인의 정치사상에서 바탕을 이루는 덕치주의 내지 정치에서의 도덕 중심주의의 근거라고 하겠으며, 공자의 정치사상 근저에도 이 같은 기대가 있었다.

그는 애초 위정자 특히 최고 권력자인 군주에게 기대를 걸어 각국을 편력하면서 자기의 사상을 설명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인'을 터득하게 함으로써 학식과 함께 인격적인 '덕'을 겸비하는 군자가 되도록 하고, 그들을 장래 정치의 요직에 나아가게 함으로써 난세를 전쟁이 아니라 평화적 방법으로 평정하려 했다. 

 사상이 현실적이고 상식적인 듯하면서도 매우 심오하며, 제자들을 교육하는 데도 개인의 능력과 이해도에 따라 적합한 방법으로 유도하여 상품을 개발시켰다.

공자의 정치사상으로는 군주가 덕으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이에 따라 백성의 덕도 높아져 그 결과로써 도덕이 고루 퍼진다면 온 세상이 저절로 평화로워진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 사고방식은 난세 아래의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고, 엄숙, 온화, 원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공자가 예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예의가 무슨 소용이겠는가!”라 하였으며 또한 공자와 지하의 대화에서 채색은 흰 바탕이 있은 연후에야 가능하다는 비유를 들어 예의 근본에 대해 강조한 것에 따르면 공자의 '예'는 외면적 사회규범의 측면도 가지지만 그 바탕에 정직한 마음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백성을 중시하고 인간의 심미적 부분을 존중하는 것은 유교가 공자 사상의 장점이다. 반면 존비친소적 규범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유가의 삼년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공자는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을 다하기 위해 삼년상을 치르는 것이 사람의 도에 바르다고 여겼는데, 묵자의 사상을 지지하는 비판자들은 삼년상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례허식이며, 그와 같은 관념이 백성들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주장하였다.

공공자, 묵자의 사상을 서양 철학으로 분류하면 유심론에 가까우므로 공유되는 부분도 존재한다. 자 사상과 묵자 이론은 존비 친소적 규범에 관한 부분은 차이가 있으나, 본질적 이상의 차이라기보다는 방법론적 차이이다. 

공자의 사상은 생시에 실현되지 못한 채 증자/자사를 거쳐 맹자에 이르러 활기를 띠고, 한 무제 이후 중국의 사상계를 지배한 가장 커다란 주류를 이루었으며, 또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