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_쇠렌 키르케고르 두번째 이야기>

<쇠렌 키르케고르에 대하여>

키르케고르의 저서들은 그의 사후 수십 년이 지날 때까지도 널리 유용하게 쓰이지 못했다. 그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당시 덴마크 내에 주요한 조직 중 하나였던 덴마크 국교회는, 될 수 있으면 키르케고르의 책을 언급하지 않고 회피하려 했고, 다른 덴마크인들도 그렇게 하기를 권했다. 게다가 독일어나 프랑스어, 영어 같은 주요한 언어권에서 덴마크 언어가 널리 쓰이는 말이 아니어서, 덴마크어 사용자가 아닌 독자들이 키르케고르를 가까이하여 알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워드 V. 홍과 에드나 H. 홍이 감수하였다. 세 번째 공식적 번역은 쇠렌 키르케고르 연구 센터의 지도로, 55권 분량으로 확대되어 출간될 예정이며, 2009년 이후에 완성되리라 여겨진다.

유신론자이건 무신론자이건 많은 20세기 철학자와 신학자는, 키르케고르로부터 여러 개념을 끌어오곤 한다. 분노·절망의 개념이라든가, 개인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를 예로 들 수 있다. 철학자로서 키르케고르가 지닌 명성은, 1930년대에 대단했다. 왜냐하면 당시 타오르기 시작한 실존주의 운동이 그를 선구자로서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희곡작가 헨리크 입센도 키르케고르에 흥미를 갖고, 그의 저서들을 나머지 스칸디나비아반도 지역에 소개하였다. 1870년대에 키르케고르 저서 중 일부가 독립적으로 독일어로 번역되기 시작하였고, 키르케고르 저서 전체에 대한 학문적인 독일어 번역은 1910년대에 이르러서야 실현되었다. 이 번역들은 키르케고르가 20세기에 독일, 프랑스, 영국의 지식인과 작가 등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첫 번째 학구적인 관심이, 독일어를 덴마크어만큼 잘했던, 그의 동료인 덴마크인 게오르그 브란데스의 활약 덕분에 키르케고르에게 주어졌다. 브란데스는 키르케고르에 관한 첫 공식적인 강의를 했고,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키르케고르에 관한 관심이 생기게끔 도왔다. 1877년 브란데스는 또한 키르케고르의 철학과 삶에 대한 첫 번째 책을 출간하였다.
1930년대에, 첫 번째 학문적인 영역본이 나왔다. 번역한 사람들은 알렉산더 드루, 데이비드 F. 스웬선, 더글러스 V. 스티어, 그리고 월터 라고 우리였고,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일하는 찰스 윌리엄이 편집자로 수고했다. 이차적이고 최근에 광범위하게 인용되는 학문적인 영어 번역본은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서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에 출간하였다.


영향을 받은 사상가들은 이러하다. 키르케고르에게 영향을 받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마르틴 부버, 루돌프 불트만, 알베르 카뮈, 마르틴 하이데거칼 바르트, 시몬 드 보부아르, 닐스 보어, 디트리히 본회퍼, 에밀 브루너,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  라인홀트 니부어,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 프란츠 로젠츠바이크장 폴 사르트르, 조셉 솔로베이치크파울 틸리히, 가브리엘 마르셀메를로 퐁티미겔 데 우나무노카를 야스퍼스,등이 있다. 파울 파이어아벤트의 과학적인 무정부주의는 키르케고르가 언급한 진리로서의 주체성에 영감을 받았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키르케고르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제리 표도르는 키르케고르가 “대가이며, 다른 철학자들이 뛰노는 무대에서 빠져나온 사람”이라고 적었다.  현대 철학자 중 엠마누엘 레비나스, 한스게오르크 가다머, 자크 데리다, 위르겐 하버마스, 알라스데어 매킨타이어그리고 리처드 로티 같은 사람들은, 때때로 매우 비판적이지만, 그들 또한 키르케고르의 통찰 중 일부를 수용하고 있다. 

그는 “키르케고르는 나에게 멀고도 깊었다. 그가 지닌 영혼의 깊이가 좋은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어도, 그는 나를 당황하게 했다.”라고 주장했다. 칼 포퍼는 키르케고르를 “기독교 윤리의 위대한 개혁자, 당시 관료적인 기독교의 도덕성이 사실은 반(反)기독교적이고 비인간적인 위선이라고 폭로한 사람”이라고 언급했다. 

대학에서 키르케고르는 논문〈아이러니의 개념-소크라테스를 염두에 두고〉를 썼다. 이 논문은 대학의 심사 교수들이 주목할 만큼 잘 만들어졌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너무 길고 철학적인 논문치고는 문학적인 성격이 강했다. 키르케고르는 1841년 10월 20일 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그의 가족은 대략 31,000 덴마크 리그스달러 정도의 유산을 상속했고, 그것은 키르케고르가 교육을 받고 생계를 유지하며 그의 여러 초기 저서를 출판하는 데 밑천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슬픈 마음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키르케고르에게 파멸의 시기는 1836년 자살 미수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지만, 이 사건 이후에 그는 점차 안정을 되찾는다. 

키르케고르는 시민 윤리 학교에 다녔다. 그곳에서 라틴어와 역사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아버지 미카엘과 형 페테르의 권유를 받아 키르케고르는 18세에 코펜하겐 대학교 신학부에 입학한다. 대학교에 들어간 이후에 키르케고르는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며 "기독교는 광기"라고 말할 정도로 기독교에서 멀어진다.